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왜 [[아나톨리아]]를 수복하지 못했나 === 제국은 [[아나톨리아]]를 다시 획득하는 데에 크게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서유럽]]에서 출발한 [[십자군]]은 아나톨리아 남부 해안선을 따라 [[예루살렘|성지]]로 가는 육로를 확보하였는데, [[콤니노스 가문]]의 황제들은 귀족들의 세력 기반인 아나톨리아를 재탈환하기보다는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총대주교좌 도시]]이자 성지에 버금가는 지위를 가진 [[안타키아|안티오키아]]를 획득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었다. 결국 동로마의 황제들은 [[마누일 1세]]를 제외하면 아나톨리아에 정착한 [[튀르크인]]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소홀했고, 그들이 세력을 키우는 동안 몇 차례의 작은 원정 이외에는 별다른 활동을 벌이지 않았다. 물론 콤니노스 왕조가 아나톨리아를 전적으로 '''[[방치]]'''한 건 아니었다. 당시 제국의 여력이 아나톨리아에 전력할 만큼 풍부하지도 않았고, 이미 아나톨리아는 완전히 튀르크인의 손에 넘어간 뒤였기에 수복했다 하더라도 모든 행정체계를 재건하고 [[유목민]]인 [[튀르크멘]]의 습격으로부터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선 요새화가 필수적인 정책이었는데 그게 워낙 돈과 인력이 많이 드는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알렉시오스 1세]]는 즉위하자마자 [[로마-노르만 전쟁|노르만족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했고]], 그 다음엔 [[페체네그]]와 싸웠으며, 그와 거의 동시에 키프로스의 반란자와 [[스미르니]]의 튀르크인 토후 [[차카(반란자)|차카]]와도 전쟁을 벌여야 했다. 결국 그가 아나톨리아에 제대로 신경을 쓸 수 있었던 시기는 페체네그 전쟁이 끝난 [[1091년]] 이후뿐이었는데 그 마저도 차카와 키프로스의 반란자와의 전쟁에 대부분의 시간과 자원을 빼앗겨버렸다. 애초에 알렉시오스 1세가 [[디라히온 전투]]에서 남아있던 대부분의 야전군을 상실한 이후에는 제대로 된 병력도 없었다. 먼 옛날 [[이라클리오스]] 이전의 고대 후기나 심지어 그 이전의 [[고대 로마]]까지 역사가 거슬러올라가는 수많은 부대가 이 즈음 10년 간격으로 1071년 만지케르트 혹은 1081년 디라히온 전투에서 전멸 혹은 전멸에 근사한 수준까지 분쇄되어서 역사가 끊어졌다. 그럼에도 알렉시오스 1세는 [[십자군 전쟁]] 이전에는 [[니케아]]와 [[비티니아]]를 수복하기 위해 심복 [[타티키오스]]와 그나마 남아있는 병력을 동원해 미시아와 비티니아에서 어느 정도 세력을 재건했으며, 십자군 전쟁 이후에는 십자군과 황제 본인의 처남 요안니스 두카스 대공이 이끄는 제국 함대를 이용해 서부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을 수복하는 성과를 올렸다.[* 십자군이 니케아, 도릴레온, 이코니온 등의 주요 도시를 탈환해 제국에 반환한 것은 맞지만 스미르니, [[에페소스]] 등의 이오니아 해안도시와 코마, 트랄리스와 같은 메안드로스 강 유역 수복은 오직 제국군만이 전담했다.] 십자군 전쟁 이후에도 아나톨리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건 이전과 마찬가지였지만 니케아, 아드라미티온, 니코미디아 등의 아나톨리아 해안가를 요새화하여 튀르크인의 대규모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으며 드디어 아나톨리아에 집중할 수 있게 된 [[1116년]]에는 수 만 명의 대군을 동원해 아나톨리아 내륙으로 진군하여 [[필로멜리온 전투|필로멜리온에서 룸 술탄국의 주력군을 박살내고]] 부근의 [[로마인]]들을 구출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콤니노스 가문의 황제들이 '부유한 [[아나톨리아]] 해안지역과 역사적 상징성이 큰 대도시 [[안티오키아]]의 탈환에만 집중하고, 군사적 요충지이지만 황제권에 도전하는 귀족들의 본거지이기도 했던 아나톨리아 '''내륙'''은 상대적으로 도외시한 건 맞다. 이 대목에서 주로 눈여겨 볼 것은 국정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어린 황제였던 [[알렉시오스 2세]]와 노련하고 정력적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안드로니코스 1세]]의 치세, 그리고 그런 황제가 있었다는 것도 잊기 쉬운 이사키오스 1세의 치세를 제외하면 [[알렉시오스 1세]]가 즉위한 1081년에서 [[마누일 1세]]가 사망한 1180년의 딱 100년에 해당한다. 이 시기가 바로 흔히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중흥기' 라고 불리는 콤니노스 3현제의 치세이다. 이 100년은 동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그리 편한 시기가 아니었으나, 그 점은 근본적인 전략적 실수에서 보면 커버해주기 어려워진다. 애초에 알렉시오스 1세의 치세 자체가 [[1071년]] [[만치케르트 전투]]의 대패 이후, 아나톨리아 반도 전체의 상실과 이로 인한 군사력의 총체적 붕괴, 그리고 화폐 가치가 1/10 이하로 떨어질 정도로 극심한 재정난과 함께 시작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서유럽, 페체네그족을 비롯한 북방 유목민, 동방의 이슬람 제국이라는 3면 전선을 유지해야 했다지만, 이 점은 초유의 위기에 시달리던 7세기 제국도 더욱 더 크게 겪었던 어려운 점이었다. 당대의 동로마 제국이 군사력에서 여유 있는 시기는 아니었으나, 아나톨리아에 반독립적인 군사 귀족들을 재건하지 못할 정도 상황은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국가 지출(특히 전비 지출)을 감당하기 위한 세수 확보에 필수적인 아나톨리아 '''해안지역'''의 탈환을 우선시 한 것 자체는 옳은 선택이었으나, 황가의 힘과 입장만을 우선시한 아나톨리아 '''내륙''' 탈환 의지는 애초부터 매우 실현되기 어려웠다. 콤니노스 황제들이 아나톨리아 수복 자체는 끊임없이 시도했으나 그것이 실패했던 건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다. 산악 지역부터 수복했어야 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콤니노스 황조가 아나톨리아 내륙의 탈환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지만, 변명은 되지 못한다. 제국은 1차 십자군이 아나톨리아 내륙을 행군하면서 수복하고 반환한 이코니온, 티아나, 케사리아, 이라클리아 등의 도시를 유지할 여력조차 없었다지만, 발칸 반도에 일단 피신해 있던 옛 군사 귀족들의 거점을 회복하는 걸 알렉시오스 1세가 극력 꺼렸기에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스티븐 런치만 경의 'The History of Crusades' 에 물론 다음과 같은 참조할 내용은 있다. 침탈지의 기존 그리스계 기독교인 주민들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주어졌다고 한다. 첫째, 아직 제국령인 지역이나 튀르크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오지로의 피난. 둘째,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튀르크의 힘에 복종해 재산과 목숨을 보호하는 것. 셋째, 튀르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정체성을 유지하고 지역에 남는 것. 첫 번째 선택지와 두 번째 선택지를 택한 주민들이 상대적으로 많았고, 이는 아직 튀르크의 손에 있던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제국의 영향력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지만, 이러한 과정은 한 번에 완료된 게 아니라 백 년 넘게 진행되었던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상술한 대로 콤니노스 왕조의 황제들 또한 놀고 있지 않고 꾸준히 자력으로 튀르크인들의 세력을 축소하거나 굴복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기본적인 군사적 전제에 무리가 있었던 이상, 내륙 지역을 탈환한다고 해도 이슬람화, 튀르크화되어서 점점 튀르크에 동화되어가는 그 지역 주민들의 동요를 잠재우긴 대단히 어려웠다. 그 지역을 튀르크 유목민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내며, 수십년 만에 그 지역에 행정 조직을 온전하게 재건하려면 결국 답은 예전처럼 제국에게 충성하는 반독립적인 군사 귀족들을 재건하거나, 그 자리에 십자군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으나 국내 안정을 우선시한 콤니노스 왕조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안이었다. 물론 콤니노스 왕조의 황제들이 무능하고 무관심하진 않았으며, 알렉시오스 1세의 외교 정책을 근본부터 반성한 마누일 1세는 상당한 성과를 올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제국의 역량을 보면 마누일 1세 뒤에 제대로 된 후계자들이 있었어도 아나톨리아 수복이 끝내 불가능했을 거란 가정은 무리한 가정이며, 콤니노스 왕조의 통치가 결국 제국의 튀르크에 대한 약세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던 필연이란 주장은 많이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러나 콤니노스 왕조의 황제들이 취한 군사 전략에 애초부터 적지 않은 무리가 있었던 건 사실이며, 이것이 아나톨리아 수복에 무시하지 못할 장애물이 된 건 부인할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